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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의 프로악담러]
이승환의 신곡 ‘돈의 신’ 뮤직비디오 중 한 장면. 드림팩토리 제공
한국의 심의제도는 오랫동안 대중음악의 생명력을 갉아먹어 왔다.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오래전에 폐지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까지 해결한 건 아니다. 여전히 청소년 보호라는 미명 아래 사실상 사후검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정부 부처가 담당하고 그 기준마저 시대착오적인 생각들로 점철된 현실은 케이팝 전성기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방송국 심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 부처의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보다 강제성이 덜하고 조금 유연할 뿐이다. 그렇게 매년 많은 곡에 허황한 19금 혹은 방송불가 낙인이 찍힌다.
최근 <문화방송>(MBC)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이승환의 ‘돈의 신’도 이런 현실이 낳은 피해 사례다. 욕설과 비속어를 비롯하여 문제시할 지점을 찾기 어려운 이 곡에서 문화방송 심의실이 잡아낸 건 ‘오, 나의 개돼지’란 부분. 파면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현실로 옮겨왔던 영화 <내부자들>의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런데 오로지 문화방송만 불가 판정을 내렸다는 점이 흥미롭다. 방송사 심의는 청소년보호위원회(여성가족부 산하)의 ‘청소년 유해 매체물’과 달리 법적인 제재가 없으며, 자율적으로 행해진다. 결국 문화방송만 이승환이 봉헌한 곡의 주인공, 이명박 ‘가카’(각하)와 그 지지자들의 심기를 살펴 ‘알아서 꼬리를 내린’ 셈이다. 한국의 대중음악 심의가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씁쓸한 사건이다.
가장 큰 문제는 심의 기준이 너무 추상적이고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몇몇 전문가는 맥락 살피기의 필요성마저 역설하는데, 오히려 이것은 ‘돈의 신’의 경우처럼 위험한 결과로 이어질 확률만 높일 것이다. 개개인의 해석에 따라 파악하는 바는 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계 대중음악의 흐름을 주도하는 미국의 방식이 가장 타당하고 명료하다. 다른 요소 일체를 배제한 채, 욕설과 총기, 마약, 남녀 성기 등을 일컫는 비속어처럼 유해한 단어만을 특정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범죄를 미화하는 것’, ‘성행위를 지나치게 묘사한 것’, ‘불건전한 교제를 조장할 우려가 있는 것’ 등과 같이 모호한 작금의 기준은 설득력이 떨어질뿐더러 표현의 자유를 수시로 침범하게 된다.
국외의 경우, 유해하다고 판단할 만한 단어를 묵음 처리한 버전만 있다면 주제와 소재가 무엇이든 문제없이 방송을 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구멍은 있다. 사회적으로 정말 좋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만한 곡들, 가령 성폭행 미화나 사회적 약자 비하 내용이 담긴 곡도 무분별하게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지점에 대한 판단과 규제는 정부나 방송사가 아닌, 대중 사이에서 행해져야 옳다. 대중이 판단 주체가 되면 이것은 검열이 아니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실제로 한국보다 훨씬 심한 유해 단어들이 난무하는 미국 대중음악계에선 대중에 의한 보이콧이 활발히 일어난다. 약 2년 전 데이트 폭력을 암시하는 가사를 쓴 래퍼가 대중의 지탄을 받은 뒤 공식 사과한 일화는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에서도 일부 방송사는 나름 구체적인 유해 단어의 기준을 세워놓고 국외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런 곳조차 지정된 금지 단어 중에 여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많다. 수십년간 지리멸렬하게 이어져온 심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첫째, 정부 부처의 심의가 반드시 사라져야 하며 둘째, 방송사들은 유해 단어 선정의 수위를 낮추고 대부분이 공감할 만한 선에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끝으로 대중과 언론은 끊임없이 이 사안을 공론화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심의 석기시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강일권, <리드머> 편집장,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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