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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조회 15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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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의 아재음악열전]

 

<라붐>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라붐>의 한 장면.


며칠 전 중학생 아들 녀석의 방에 들어갔다가 문득 30년 전 내 공부방을 떠올려본 일이 있었다. 당연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리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노트북과 태블릿 피시가 방의 주인처럼 자리잡았다. 손에 잡기만 해도 막 저절로 공부가 될 것같이 멋지게 생긴 필기구들도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이 봤다면 군침을 흘렸을 거다. 여름이면 슬그머니 방에 들어오던 한일선풍기보다 열 배는 더 시원한 에어컨이 벽에 달려 있다. 꼽아보니 아들 녀석의 방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봤다면 신기하고 부러운 것들 천지다. 그러나 녀석이 갖지 못한 나의 보물이 있다. 이제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아틀란티스의 유적 같은. 아들아, 코팅 책받침이라고 들어봤냐? 하하.

 

‘아재’와 ‘언니’들의 학창시절 공부방 풍경. 벽에는 브로마이드, 책상에는 책받침이 있었다. 밋밋한 플라스틱 책받침을 쓰는 냉혈 청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아하는 하이틴 스타의 사진을 비닐로 코팅한 책받침을 썼다. 방송사에 들어와서 수많은 연예인을 만났지만, 고백건대 심혜진과 함께 일하게 되었을 때 제일 감개무량했던 이유도 그가 나의 책받침 스타였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심혜진은 내 또래 아이들이 좋아하던 전형적인 하이틴 스타는 아니었다. 청순함의 대명사 이미연과 ‘귀염미’ 터지는 이상아 누나 등등이 코팅 책받침의 단골 모델이었는데, 나의 선택은 심혜진이었다. 디제이와 피디로 그를 만나 일하면서 너무나도 털털한 본모습에 소년의 환상은 와장창 깨져버렸지만, 마치 다른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전히 그 시절 심혜진 누나를 추억하면 새콤한 기운이 입안에 감돌곤 한다.

 

해외 스타들을 책받침에 가둔 친구들도 많았다. 왕조현,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주윤발과 장국영, 유덕화 등의 홍콩 남자배우들 등등 많은 스타들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스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오늘의 주인공 소피 마르소 누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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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붐>의 한 장면.


요즘은 손안의 스마트폰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와 엔터테인먼트를 해결할 수 있지만 책받침에 스타들을 가두던 1980년대엔 그렇지 않았다. 음악도 영화도 지극히 제한된 매체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라디오는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내가 소피 마르소를 알게 된 것도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영화 <라붐>의 주제곡 ‘리얼리티’를 들었던 순간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나? 아직 헤비메탈에 완전히 경도되기 전, 귀도 마음도 말랑말랑하던 소년은 아름다운 선율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 노래가 영화 주제가라는 사실을 알고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프랑스 영화에서 소피 누나를 마주친 순간, ‘리얼리티’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너무 예뻐서 얼이 빠졌다. 불어를 배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로.

 

 

이런 경로로 소피 누님을 영접했던 아재들이 몇 명이나 될까? 수만? 수십만? 100만명은 넘으리라 장담한다. 왜냐하면, 믿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프랑스에서 1980년에 개봉한 영화 <라붐>은 국내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개봉한 건 무려 33년이 지난 2013년. 그러니 당시 <라붐>을 본 청소년들은 모두 비디오를 본 거다. 비디오 타이틀을 따로 홍보하지 않았으니, 라디오에서 영화 주제곡 ‘리얼리티’를 듣고 영화를 보게 된 경우도 많았을 거다.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이 노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장면들이 있는데, 라붐에서 ‘리얼리티’가 나오는 장면도 그렇다. 광고에서도 여러 번 패러디된 장면인데, 영화 속에서 마티외(알렉상드르 스테를링)가 빅(소피 마르소)에게 씌워주는 헤드폰을 통해 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지금 생각해도, 라디오 피디의 자존심을 걸고 내가 아는 수많은 노래를 싹 뒤져봐도, 그 장면에서 ‘리얼리티’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는 없다. 영화 속에서 노래를 듣는 소피 누나의 표정은 또 얼마나 청순한지. 뮤직비디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노래와 영화, 배우가 서로 녹아들어간 명장면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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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소피 마르소. <한겨레> 자료사진


영화 제작 당시 겨우 15살이었던 소피 마르소는 <라붐> 개봉 이후 단숨에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라붐> 속편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다. 보통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배우들이 어른이 된 뒤에는 방황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피 마르소는 그렇지 않았다. 예술영화에서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까지 섭렵하고, 직접 소설을 써서 출간하기도 했다. 2002년에는 감독으로도 데뷔해 몬트리올 영화제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무엇보다 멋진 모습은 아직까지도 연기 활동을 이어나가는 현역 배우라는 점. 그 시절 책받침 스타들이 대부분 은퇴한 지금, 소피 누나는 연기 생활 4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게다가 아직도 너무나도 아름다우시다, 흑흑.


여름밤. 첫사랑을 추억하기 좋은 시간이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리얼리티’를 들어보자. 우리에게도 분명히 첫사랑이 있었다. 잘 지내지? 연락이 닿아도 카톡은 보내지 말자.

 

이재익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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