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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정학을 당한 적이 있다. 자세한 얘기를 나중에 할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질풍노도의 시기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를 착하고 귀여운 소녀가 잡아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갑내기 그는 교복 위에 옅은 색의 가디건을 즐겨 입었고 천으로 만든 게스 숄더백을 책가방으로 메고 다녔다. 작고 말간 얼굴에 머리는 항상 뒤로 질끈 묶어 볼록한 이마를 드러냈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는데, 나 역시 그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랑에 빠졌다.
록음악에 미쳐 있었던 나는 수많은 그룹들의 노래를 그에게 들려주었지만 그는 모두 시끄럽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잔잔한 발라드를 즐겨 들었고 특히 리차드 막스를 좋아했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대 초반 여학생들 사이에서 리차드 막스의 인기는 굉장했다. ‘나우 앤 포에버’, ‘라이트 히어 웨이팅’ 등의 히트곡들은 지금도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청곡으로 종종 들어온다.
고백건대, 그때도 지금도 나는 리차드 막스는 질색이다. 직업상 방송에서 신청곡을 틀긴 해도, 내가 자발적으로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 시절엔 착한 여자친구와 뭔가 공유할 것이 필요했기에 나는 종종 이어폰을 나눠끼고 리차드 막스의 끈적끈적한 발라드를 들었다. 그러면서 나누었던 키스는, 그래도 달콤했다. 그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질풍노도 고교생이었던 나는 아예 엇나가버렸을 지도 모른다. 감사한 인연이었다.
리차드 막스의 달콤한 목소리와 대책 없는 사랑타령 가사를 욕하면서도, 나 역시 간지러운 하이틴 로맨스를 즐겼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어떻게 연애를 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절 고딩 연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를 들자면 연애편지일 거다. 내가 그에서 써준 자작시가 얼핏 기억난다. 아마 독서실 책상에 있던 낙서에서 힌트를 얻어서 쓴 시로 기억하는데 대충 다음과 같다. 웃다가 토하지 마시길.
국어시간에는 너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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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든 뒤 그 편지를 떠올리면 민망해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는데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바로 그런 게 사랑, 적어도 남자와 여자가 하는 사랑의 참모습임을.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기꺼이 유치해지고 또 기꺼이 유치함을 받아주는 것.’
이것이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이다. 세월의 무게, 생활의 편의, 세속적인 윤리관 등등이 얽히기 전의 순수한 사랑의 정수. 사랑에 있어서 신뢰와 존경도 필요하지 않냐고? 그건 본질이 아닌, 부가적인 요소다. 신뢰와 존경은 만나본 적도 없는 백범 김구 선생이나 마더 테레사에게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십 수 년 간 소식이 뚝 끊겼던 리차드 막스의 뉴스를 몇 달 전에 접했다. 뜻밖에도 항공기내 난동 사건! 소란을 피우는 승객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해외공연차 탑승했던 팝스타 리차드 막스가 개입했고, 이후 항공사의 미숙한 대처를 질타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내용.
그리고 최근에 팝스타다운 뉴스가 다시 떴다. 오는 6월에 내한 공연을 하신단다. 그때는 비행기에서 별일 없으시길.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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